‘빨갱이’의 얼굴…비전향 장기수 19인의 초상
비전향. 방향을 바꾸지 않았다는 말이다. 자신이 믿는 사상이나 이념을 그와 배치되는 방향으로 바꾸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회와 격리되어 감옥에 장기간 수감된 사람들이 있다. 우리 는 그들을 ‘비전향 장기수’라 부른다.
류기진, 김동섭, 문일승, 김교영, 이두화, 서옥렬, 허찬형, 양원진, 최일헌, 박정덕, 박순자, 오기태, 박종린, 김영식, 강담, 박희성, 양희철, 이광근, 그리고 김동수. 평균 나이 87세. 짧게는 3년에서 길게는 37년까지, 이 19명의 복역기간을 모두 합치면 384년이 된다. 수감생활을 마쳤지만, 생활고에 묶이고 병에 묶여 감옥 밖에서도 영어의 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빨갱이’라는 낙인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웠고, 복역하는 동안 얻은 지병들로 인해 일상생활조차 힘들었다. 대부분이 생계급여와 노령연금에 의지해 궁핍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01정지윤 _ 귀향(歸向). 류기진(1925년생) 함남 신흥군, 복역기간 11년
1930년대에 시행된 ‘사상전환제도’라는 폭력적인 제도는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희망하던 사람들의 인권을 묵살했다. 이 제도는 우리나라와 일본에만 존재하는 악제였다. 일본의 경우 패전과 함께 제도가 사라졌으니, 사실상 한국에만 존재한 셈이다. 이승만, 박정희를 거치며 절정에 달한 폭압은 ‘비전향장기수’라는 군(群)을 만들어냈다. 1998년에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이 제도가 폐지되고, 2000년 6.15공동선언으로 이들 가운데 63명은 그리던 북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러나 1차 송환 당시 미처 신청을 못했거나, 전향서를 썼다는 이유로 제외된 30여명은 이곳에 남아야 했다. 올 여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병마와 싸우던 김동수 어른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제 2차 송환을 희망하는 비전향장기수는 18명만 생존해 있다.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비전향장기수들을 만나 그들의 구술을 기록하고 초상과 일상을 사진에 담은 이는 사진가 정지윤(경향신문 기자)이다. 사진가는 짧은 만남으로 비전향장기수들의 길고 긴 고통의 역사를 표현하는 것을 염려했지만, 이만큼의 기록조차도 전무한 상황이었다.
#02정지윤 _ 귀향(歸向). 박종린(1933년생) 평양시, 복역기간 35년
초상 사진 속에서 노인들은 검은 막 앞에 서거나 앉은 채다. 더러는 지팡이에 의지한 채로, 또는 환자복을 입고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로. 하지만 검은 막과 흰 머리칼, 형형한 눈빛의 대비는 그저 ‘노인’이 아니라 비전향장기수로서 끝내 ‘전향하지 않은’ 신념과 자존을 뚜렷이 드러낸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가리워지고 잊힌 이들이, 검은 장막 속에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귀향(歸向) _ 비전향장기수 19인의 초상>의 의의가 여기에 있다.
“이분들 중에서 북으로 가기를 원하는 분들을 돌려보내는 것은 우리 사회가 강제전향제도의 악령을 떨쳐버리는 중요한 한 걸음이 될 것이다.” 라는 한홍구 교수(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의 말처럼, 한 평생 고통과 고독 속에서 버텨온 이들을 우리는 이제 하루 빨리 보내주어야 한다. 태어난 고향이든 사상적 고향이든 ‘단 하루를 살더라도’ 고향의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이들의 귀향(歸鄕)을 도와야 한다.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는 귀향(歸向)을...
정지윤 사진가의 <귀향(歸向) _ 비전향장기수 19인의 초상> 전시회가 10월2일(화)부터 14일(일)까지 갤러리 ‘류가헌’에서 열린다. 정지윤 작가는 1995년부터 경향신문 사진기자로 일하고 있다. 23년 동안 사건. 사고 및 기획사진을 담당하며 뉴스 현장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지면을 통하여 우리 사회에서 사라져가는 여러 가지 풍습과 사람들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잡아내어 사진의 본래 기능인 기록성의 의미를 넘어서 새로운 지평을 넓히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비전향장기수, 제주4.3 70주년. 쌍용차 해고노동자, 난민인권 기획 등 지금까지 50여 편의 다큐멘터리 사진기획을 진행,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생각 있는’ 사진작가이다.
#05정지윤 _ 귀향(歸向).
정지윤 사진가는 작업노트를 통해 “그들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감옥에 있었다. 수십 년 넘게 감옥에서 숱한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나는 감옥생활도, 고문을 당해 본 적도 없다. 고민스러웠다. 짧은 만남으로 비전향장기수들의 길었던 아픔의 역사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게 해야 할 때는 가슴이 먹먹했다. 검은 천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는 더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그들은 역경을 이겨낸 만큼 강했다. 그리고 풍파를 겪고도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폭염을 뚫고 멀리서 찾아온 나를 걱정하고 격려해 주었다. 반갑게 맞아주었고 헤어짐을 오히려 아쉬워했다. 담담하게 전해준 그들의 증언은 ‘화석에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듯’ 생생했다”고 전한다.
조국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이들의 꿈은 언제쯤 이뤄질까. 우리 사회에서 권력에 반대하는 사람에게 덧씌워 왔던 ‘빨갱이’란 표현은 사실 실체가 없다. 비전향 장기수들은 그들의 관점에서 지독한 ‘빨갱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은 빨간색도 아니고, 그들의 소망은 색깔과는 전혀 관계없는 인간적이고 본능적인 그리움이다. <귀향(歸向) _ 비전향장기수 19인의 초상> 전시회는 남북 화해의 시대를 맞아 비전향 장기수의 표정 속에서 우리 민족이 진정으로 갈구하는 미래는 무엇인지 일깨우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전시문의 ‘류가헌’ (02) 720-2010 서울 종로구 청운동 113-3(자하문로 106)
[작업노트] 94명의 비전향 장기수의 복역기간 총 2854년
비전향장기수들은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잊혀진 사람들이었다. 분단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살아온 사람들이지만 기억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며 굳건하게 버텨왔다. 그림자처럼 살아온 이들의 한결 같은 바람은 가족과 고향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민가협 양심수후원회의 통계에 따르면 94명의 비전향장기수가 감옥에서 보낸 햇수를 합하면 2854년에 이른다. 1인당 평균 31년의 징역을 살았다. 2000년 6·15공동선언에 따라 63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이 북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1차 송환 당시 미처 신청을 못했거나 전향을 했다는 이유로 제외된 30여명은 남아야 했다. 그로부터 17년의 세월이 흘렀다. 송환을 요구한 이들 중 15명이 세상을 떠났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났다. 두 정상은 판문점선언을 통해 분단으로 인한 인도주의적 문제를 해결하기로 약속했다. 비전향장기수들은 11년 만에 성사된 이번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가 컸다. 판문점선언을 지켜본 이들은 큰 틀에서 환영하고, 박수를 보내면서도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선언문에 비전향장기수 송환 문제가 구체적으로 거론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0년 6·15공동선언에서는 ‘이산가족,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비롯한 인도주의 문제를 해결’하기로 명시한 것과 대조되었다. 그럼에도 ‘민족 분단으로 발생한 인도적 문제를 시급히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과 ‘이산가족·친척 상봉을 비롯한 제반문제들을 협의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고 한 부분의 함축성에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이번 비전향장기수 사진작업은 한권의 책이 시발점이 되었다. 3년 전 보리출판사 윤구병 대표가 내게 선물한 책이었다. 빨간색 표지가 인상적이었던 ‘어느 혁명가의 삶’이란 제목의 만화책이었다. 600쪽이 넘는 아주 두꺼운 장편 그래픽노블(만화와 소설의 중간 형식)이었다. 1920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전쟁, 그리고 분단에 이르기까지 평화와 통일을 위해 살아온 비전향장기수 고 허영철 선생의 아흔 해의 삶이 담겨 있었다. ‘그땐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았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허영철 선생의 삶은, 그 자체가 새롭게 읽는 한국 현대사였다. 그때부터 비전향장기수에 대한 사진 작업을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
본격적인 사진 작업은 올여름 시작되었다.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19명의 비전향장기수들을 약 한 달에 걸쳐 만났다.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빨갱이’ 중에서도 ‘골수 빨갱이’로 낙인찍혔다. 그런 탓에 오랫동안 사회와 격리됐다. 적어도 20년 이상을 감옥에서 보내야했다. 이후에도 보안관찰법 때문에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이들의 복역기간을 합치면 384년에 이른다. 평균 나이는 87세다. 감옥에서 나온 이들은 정착할 고향과 가족이 없어 대부분 떠돌이 생활을 했다. 일자리 구하기도 힘들어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지금도 대부분이 생계급여와 노인연금에 의존해 살고 있다.
류기진, 김동섭, 문일승, 김교영, 이두화, 서옥렬, 허찬형, 양원진, 최일헌, 박정덕, 박수분, 오기태, 박종린, 김영식, 강담, 박희성, 양희철, 김동수, 이광근. 2차 송환을 애타게 바라는 비전향장기수들이다. 서옥렬, 양원진, 최일헌, 오기태, 박종린, 김영식, 강담, 박희성, 김동수, 이광근 선생은 남파공작원이었다. 체포된 후 짧게는 21년, 길게는 3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 류기진, 김동섭, 문일승, 김교영, 허찬형 선생은 인민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전쟁포로 출신이다. 전쟁포로의 국제법상 권리조차 박탈당한 채 수십 년을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양희철 선생은 1963년 고려대 재학시절 지하당사건으로 체포됐다. 28살에 감옥에 들어가 출소했을 때 그의 나이 64살이었다. 이두화, 박정덕, 박수분 선생은 한국전쟁을 전후해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체포됐다. 꽃다운 나이에 감옥에 들어가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되어서 출소했다
그들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감옥에 있었다. 수십 년 넘게 감옥에서 숱한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나는 감옥생활도, 고문을 당해 본 적도 없다. 고민스러웠다. 짧은 만남으로 비전향장기수들의 길었던 아픔의 역사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기억들을 다시 떠올리게 해야 할 때는 가슴이 먹먹했다. 검은 천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때는 더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그들은 역경을 이겨낸 만큼 강했다. 그리고 풍파를 겪고도 순수한 마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폭염을 뚫고 멀리서 찾아온 나를 걱정하고 격려해 주었다. 반갑게 맞아주었고 헤어짐을 오히려 아쉬워했다. 담담하게 전해준 그들의 증언은 ‘화석에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듯’ 생생했다.
이번 작업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은 19명의 장기수 선생님들 덕분이다. 또한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일이다. 권오헌 명예회장, 김혜순 회장, 홍휘은 사무국장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안타깝게도 작업을 끝낸 지 채 한 달도 되기 전에 부산의 요양원에 계시던 김동수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지막까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병마와 싸우던 중이었다. 생전에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제 2차송환을 희망하는 비전향장기수는 18명만 생존해 있다. 조국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이들의 꿈은 언제쯤 이뤄질까.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정지윤 사진가·경향신문 사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