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교육이란 이름의 ‘세뇌’ ]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그는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특정한 국가관과 사회관을 갖도록 훈육된다. 황대권 생명평화마을 대표는 “훈육된 그 한 사람이 특정 사회집단이나 개인의 영향 아래 이전과 다른 가치관을 갖게 되면 세뇌되었다고 말한다. 보통 전자를 ‘교육’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를 ‘1차 세뇌’로, 후자를 ‘2차 세뇌’로 규정한다. 세뇌를 통해 입력된 정보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지배집단의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며, 비교적 최근에 입력된 정보가 과거의 것보다 영향력이 더 크게 작용한다. 1차 세뇌는 가정과 학교, 사회에서 행하여 지는 모든 교육이 다 포함되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는 불변의 조건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2차 세뇌는 범죄집단이나 극단적인 정치, 종교 집단의 자체 교육 과정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사이비 종교에 빠져 재산을 다 잃고 가정마저 해체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모든 사회의 지배집단은 1차 세뇌가 흔들림 없이 언제까지고 지속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언론과 방송은 1차 세뇌를 강화하는 프로그램을 끊임없이 되풀이해 내보낸다. 촘촘한 세뇌의 그물망 속에 갇힌 사람들은 주입된 정보의 내용이 원래 자기 것인 양 생각하면서 자기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이방인처럼 취급한다. 이와 함께 지배집단은 1차 세뇌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에게 ‘반사회적’이라는 낙인을 찍어 사회로부터 추방 또는 격리시킨다”라고 말한다. http://me2.do/5kIn0TNn 

- [ 야신 김성근을 향한 열광, 1년 새 분노로 ] 1년 전, ‘한화 이글스’와 ‘김성근 감독’은 열광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1년이 흐른 지금, 열광은 실망을 넘어 분노를 향하는 듯하다. 단지 초반 성적 부진 때문만은 아니다. 경향신문 체육부 이용균 기자는 “지난해 한화 팬들은 김 감독의 영입을 통해 순위 향상은 물론 무기력했던 한화 야구의 변화를 꿈꿨다. 6시즌 동안 5번 꼴찌를 한 팀의 팬이 가진 ‘패배감’을 넘은 ‘무력감’을 해소시켜 줄 희망의 대상이었다. 김 감독의 야구는 ‘지옥 훈련’으로 상징되는 ‘혹독한 노력’의 야구였다. 2016시즌 초반 한화를 향한 비난은 3승16패의 성적이 아니라 ‘노력을 통한 성공’이라는 기대에 대한 배반에서 비롯된다. 2007년 우승으로 빛난 SK에서의 야구와 이후 고양 원더스가 표방했던 ‘열정에게 기회를’이라는 캐치프레이즈는 청춘들에게 ‘희망의 야구’였다. 하지만 지난 시즌 후반기에 보여준 선수 기용은 노력보다는 이름값을 바탕으로 한 몇몇 선수들의 쥐어짜기로 비쳤다. ‘특타’로 대표되는 경기 전후의 훈련은 성장을 위한 노력이 아닌 무의미한 반복의 ‘노오력’으로 읽힌다. 선발의 이른 강판, 실책 뒤 교체는 치밀한 경기 운영이 아니라 ‘찍히면 잘린다’는 한국 사회의 무시무시한 노동 현실을 ‘날것’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한화는 지난 시즌부터 ‘불꽃 한화’를 내세웠다. 이 불꽃이 청춘의 열정이 아닌 청춘을 잡아먹는 지옥불로 읽힌다면, 최악이 될 수도 있다. 지금 필요한 건, 총선 결과가 그랬듯, 1승이 아니라 희망이다”라고 말한다. http://me2.do/xukJ01sy 

- [ 지금 당장 혁명에 참여하는 간단한 방법 ]  ]세상이 어떤가를 아는 가장 정확한 방법 중 하나는 가장 머리 좋은 청년들이 어떤 밥벌이에 몰리는가를 보는 것이다. 1980년대는 그런 청년들이 변혁운동에 투신했다. 변혁운동은 밥벌이가 아니다. 그러나 밥벌이를 작파하고 다른 가치에 투신하는 게 그들에게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근래 머리 좋은 청년들은 어떤 밥벌이에 몰리는가. 가장 머리 좋은 청년들은 이미 충분히 양극화한 세상에서 1%를 더 부자로 만들어주는, 1%의 악행을 덮는 이런저런 밥벌이를 선호한다.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은 “밥벌이가 어려운 세상이다. 그런데 밥벌이가 어려운 세상이 주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굶어 죽을 걱정인가. 그런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개의 경우는 밥벌이의 비교,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소비 능력의 비교가 자아내는 고통이다. 밥벌이가 어려운 세상이 주는 가장 큰 문제는 밥벌이 자체가 아니라, 밥벌이 외엔 생각할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밥벌이 외엔 생각할 줄 모르니, 1%는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부러움은 나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부러움보다 강력한 복종은 없다. 1%를 부러워하는 나는 1%가 정해주는 질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고, 1%가 내 밥을 앗아가는 일은 갈수록 더 용이해지며, 내 밥벌이는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바꾸려면 혁명이 필요하다. 다들 밥벌이를 작파하고 혁명에 투신해야 할까. 모든 사람이 전업적 혁명가로 살 순 없는 노릇이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혁명에 참여하면 된다. 지금 당장 혁명에 참여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불복종, 복종의 철회다. 복종이 부러움에서 나오니, 자기 최면이나 마인드 컨트롤로 부러움을 조작하자는 게 아니다. 부러움의 원인을 없애야 한다. 인생에서 밥벌이 외엔 생각하지 않는 것, 남의 밥벌이와 비교로 내 가치를 평가하는 것 말이다. 밥벌이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 인생에는 밥벌이 외에도 중요한 것들이 많다는 걸 기억하는 것이다. 대단한 이념도 특별한 실천도 아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일 뿐이다”라고 일깨운다. http://me2.do/5GeFVnvD 

- [ 정치의 ‘큰손’만 살피는 언론, 이제 밑바닥을 조명하라 ] 4·13 총선일 아침, 경향신문에 “권력은 ‘투표하는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제하의 사설이 실렸다. 내용은 이렇다. “시민은 자신의 ‘주권자 됨’을 입증해야 한다. (중략) 후회 없는 선택이 나의 삶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김민아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고백하건대, 논설위원실을 대표해 사설을 쓴 나도 시민의 선택이 세상을 바꾸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총선 결과는 나를 포함한 정치저널리즘 종사자들에게 자괴감을 안겼다. ‘여소야대’ 구도를 예측하는 데 실패해서만은 아니다. 정치란 무엇인가, 민심은 어떻게 집합되고 표출되는가…와 같은 본질적 질문을 잊고 있었다는 부끄러움 때문이다. 정치저널리즘이 민심을 읽지 못한 까닭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이유 중 한가지는 정치권을 좌우하는 ‘큰손’ 위주의 보도 관행이다. 선거 보도·논평은 주요 정당의 대표 등 고위 당직자와 ‘선대위 핵심 관계자’로 통칭되는 선거전략가, 그리고 정당 주변 분석가들의 발언 중심으로 이뤄진다. 평상시의 정치 보도·논평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밑바닥을 외면한 채 고공전에만 집중하면 큰 그림을 보기 어렵다. 수요자인 유권자는 물론 대다수 공급자(정치인)도 정치에서 소외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권력게임은 정치의 한 가지 속성일 뿐, 본질은 아니다. 하지만 정치저널리즘은 권력게임에 과도하게 무게를 둠으로써 주권자를 오도해온 측면이 있다. 언론은 정치권 곳곳의 변화와 역동성을 주의 깊게 살피고 과감히 조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민, 특히 청년의 가슴에 불길을 지폈던 ‘무엇’-분노이건, 저항이건, 희망이건-은 사그라지고 냉소주의가 다시 또아리를 틀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한다. http://me2.do/Gg6fTayu 

- [ 90세 전 의원, 50세 연하와 동성 결혼 ] “1996년 아내가 백혈병으로 사망했을 때 나는 다시는 그런 사랑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일흔 살이었고 또 다른 로맨스를 기대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러나 5년 뒤 플로리다의 해변에서 그런 순간을 만났다.” 부인과 사별한 미국 민주당 전 상원의원 해리스 워포드(90)가 언론을 통해 동성결혼 소식을 발표했다. 워포드는 23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 일요판에 실린 기고문에서 오는 30일 15년간 함께해온 동성 파트너 매튜(40)와 결혼식을 올린다고 밝혔다. 이성애자에서 동성애자가 된 그는 아내 클레어와 48년 동안 함께했던 결혼 생활과 매튜와의 만남을 회고하며 “내가 그토록 열정적인 사랑을 느낀 것은 두 차례뿐”이라며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젠더에 따라 나를 규정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뉴욕에서 태어난 워포드는 1950년대 변호사로 활동하며 흑인 인권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1961년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인권담당 보좌관을 지냈다. http://me2.do/5RkDa3N5  

 

 

Posted by jino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