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2일 경향신문

[ 인문학도의 외도 ] 최근 인문·사회 계열 학생들이 취업을 위해 전공을 제쳐놓고 사설 학원에서 이공계 공부를 한다는 소식이다. 이공계열 전공자에 비해 취업이 어려운 현실 탓이다. 심지어 고용노동부도 인문계 학생을 위한 IT·소프트웨어 교육 과정을 마련하겠다고 한다. 인문계 학생이 전공을 버리고 이공계로 갈아타는 것이 과연 좋은 해결책일까? 서형수 알서포트 대표는 “그들은 분명 인문계가 이공계보다 적성에 맞아 전공으로 선택했을 것이다. 단지 눈앞의 취업을 위해 이공계로 돌아선다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경쟁력을 버리는 것과 같다. O2O(온라인 투 오프라인) 시대에 각광받는 인재는 단순히 기술을 갖춘 인재가 아니라 해당 기술의 속성을 알고 그 혜택을 이용할 줄 아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다. 이들은 실 서비스 제공에 있어 이공계 전공자보다 탁월한 능력을 보인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다. 유용한 기술을 만드는 것보다 사람이 어떻게 기술을 효과적으로 쓰도록 만드는지가 더 중요하다. 인간이 만든 문화와 가치에 대해 분석하고 비판하며 탐구하는 인문학이 진가를 발휘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고 충고한다. http://goo.gl/lrgHSr

- [ 한국외교, 구한말과 닮은꼴 ] 고종은 을사늑약 5년 전인 1900년부터 대한제국 중립화를 추진한다. 하지만 실패했다. 일본의 욕심이 크고 힘도 강했던 탓이지만 중립화 정책이 실패한 데는 지배층의 문제도 있었다. 고종은 미래의 비전과 통합의 지도력을 발휘해 관료와 지식인 집단을 하나로 묶기보다 측근 중심의 궁중정치를 폈다. 황제권의 독주에 실망한 관료와 지식인 가운데 중립화보다 한·일 동맹을 지지하는 사람이 유독 많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들은 명확한 시국관을 갖고 한·일 동맹을 주장하기보다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쪽에 더 관심을 두었다. 100여년 전의 중립화란 용어를 세력균형이란 측면의 현재적 버전으로 말하면 ‘균형외교’일 것이다. 신주백 연세대 HK 교수는 “균형외교는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많이 회자되고 있다. 작년에는 중국의 적극적인 역사공조 움직임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다. 올 들어서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가입,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문제와 맞물려 큰 논란이 있었다. 한국은 비슷한 고민을 앞으로도 계속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100여년 전처럼 그냥 계속 중립을 취해야 할까. 아니면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할까. 이것도 아니면 새로운 무엇인가를 제시하며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할까. 분명한 현실은 미국과 중국 어느 쪽도 한반도 분단을 최상의 시나리오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분단을 극복하기위해 우리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 지역주의, 이념갈등, 경제 격차를 넘어서며 사회적 합의를 우리 내부에서 끌어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주변 강국들의 경쟁적 협력관계를 넘어설 수 있는 미래가치를 함께 공유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http://goo.gl/3ZYzM5

- [ 광주 출신 법무장관 ] 박근혜 대통령은 6월21일 황교안 총리 임명으로 공석이 된 법무부 장관에 김현웅 현 서울고검장(56)을 내정했다. 청와대 민경욱 대변인은 이날 춘추관 브리핑에서 “박 대통령은 오늘 황교안 신임 총리의 제청을 받아 법무장관에 김 서울고검장을 내정했다”고 밝혔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두 번째 법무부 장관에 호남 출신 인사가 선임됐다. 김현웅 고검장은 전남 고흥 출신으로 광주제일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사시 26회에 합격한 이후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 춘천지검장, 서울 서부지검장, 광주지검장, 부산고검장 등을 거쳤다. 2006년에는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을 맡을 당시 법조비리 사건을 수사해 조관행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 등 판·검사와 경찰 간부 등을 기소했다. 현 정부에서 2013년12월부터 2015년 2월까지 15개월 간 법무부 차관을 지내며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황 총리와 함께 일했다. 김현웅 고검장(16기)는 김진태 검찰총장(14기)보다 기수가 낮아 법무부 내 ‘기수 역전’ 인사도 주목된다. 검찰총장 지휘를 받는 현역 고검장이 검찰총장을 지휘하는 법무부 장관에 지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김 고검장의 부친은 판사 출신인 김수 전 의원이다. 김수 전 의원은 1979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남 보성·고흥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끌던 공화당에 입당했다. 박근혜 대통령과는 2대에ㅡ 걸쳐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간접적인 인연은 김 고검장이 호남 출신임에도 여권에서 비교적 부담 없는 인물로 받아들인 이유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고 있다. http://goo.gl/38B1i3 

- [ 100만원 벌어 31만원 빚 갚는 서민들 ] 서민층의 가계빚 부담이 점점 커지고 있다. 소득이 가장 낮은 1분위계층의 가계소득 대비 원리금 상환부담 비중이 올 1분기 30%를 넘어선 것으로 집계됐다. 연일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는 가계부채 규모도 문제지만 저소득층의 빚부담이 고소득층에 비해 빠르게 늘고 있어 소득계층별 대책이 시급하다. 6월21일 한국금융연구원이 개인신용정보업체 KCB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올 1분기 소득 1분위의 가계소득 대비 원리금 상환부담 비율은 31.4%로 나타났다. 100만원을 벌면 31만4000원은 빚 갚는 데 쓴다는 얘기다. 저소득층에서 빚부담이 빠르게 늘면 소비여력이 제한될 가능성이 높다. 경기부양책을 펴더라도 침체된 내수가 살아날 가능성이 적다는 뜻이다. http://goo.gl/8KLNzt 

- [ ‘황제택시’ 등장 ] ‘택시(taxi)’의 어원은 라틴어 타카(taxa)에서 비롯된다. ‘평가하다’ ‘부담을 지다’ ‘요금’ 등의 뜻을 지닌 말이다. 세금(tax)과 어원이 같다. 1896년 미국에서 택시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택시 교통의 화두는 요금 문제였다. 합리적으로 요금을 계산할 방법이 없으니 운전자가 맘대로 정해놓은 가격대로 이용됐다. 1891년 독일인 빌헬름 브룬이 택시미터기(taxi meter)를 개발하면서 택시 요금 정책의 전환점을 마련했고, 1905년 영국 런던에서 지금처럼 미터기를 단 택시가 처음 선보였다. 한국의 택시 역사는 1919년 일본인 노무라 겐조가 미국의 닷지(Dodge) 두 대를 갖고 세운 경성택시회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다꾸시(택시)’에는 미터기가 없었다. 시간당 대절료는 쌀 한 가마 값인 6원, 서울 도심을 도는 데는 3원을 받았다. 요즘처럼 운행거리만큼 요금을 매기는 영업 방식은 7년 뒤인 1926년 아사히택시회사가 미터기를 도입하면서 본격화됐다. 당시 미국식 단위로 2마일(3.2km)에 기본요금 2원, 그리고 0.5마일(800m)마다 50전을 받았다. 어지간한 부자는 엄두도 낼 수 없는 황제택시였다. 양권모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한국에서 면허택시 도입 100여년 만에 택시 요금의 성역을 무너뜨리는 신종 택시가 등장한다는 소식이다. 국토교통부가 8월부터 시범운영하기로 한 ‘고급택시’는 기존 택시의 개념을 깡그리 무너뜨린다. 차량 외부에 택시 표식도 없고, 미터기·카드결제기 장착 의무도 없어 겉은 일반 승용차와 차이가 없다. 무엇보다 택시 요금을 자율로 정해 신고만 하면 된다. 이제 비행기처럼 택시도 이코노미, 비즈니스, 퍼스트 클래스로 완벽한 계급화가 이뤄지는 셈이다. 쌀 한 가마 값을 내고 타던 황제택시의 부활, 그냥 부자들의 호사가 하나 늘었다고 치면 되는 것일까”라고 말한다. http://goo.gl/c5iIHj

 

 

Posted by jinokor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