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3일 경향신문
-‘인조실록’ 등을 보면 담배가 조선에 들어온 때는 1616~1618년쯤이다. ‘인암쇄어’가 “담뱃잎 한 근이 말 한 마리 값이었다”고 쓸 만큼 담뱃값은 ‘금값’이었다. 비싼 값에도 불구하고 담배는 단 5년 만에 조선 전역에 퍼졌다. ‘인조실록’은 “백해무익한 물건임을 알면서도 끊지 못하니 세상 사람들이 요망한 풀, 즉 요초(妖草)라 했다”고 썼다. 조선 최초의 흡연가 장유(1587~1638)는 “담배는 건조하고 열이 많아 폐(肺)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계곡만필). 최초의 금연 운동가인 이덕리(1728~?)는 “엄청난 돈이 담배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진다”면서 금연론을 개진했다. 하지만 중흥군주라는 정조는 “조선을 흡연의 나라로 만들겠다”고 선포할 만큼 담배를 좋아했다. <정조가 꿈꾸었던 나라가 흡연의 나라? http://goo.gl/qZUNgW>
-흡연가의 나라를 꿈꾸던 정조는 자신의 서재에 ‘홍재(弘齋)’라는 편액을 내걸었다. 그 두 글자를 인장에 새겨 자신의 책에 찍었다. ‘홍재’는 서재의 이름인 동시에 정조의 호였다. 임금이라는 자리를 떼어놓고 보면 그는 학자였고 100책이나 되는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정조뿐 아니다. 북학과 개혁의 시대였던 19세기 선비들이 서재의 이름과 자신의 호를 동일하게 쓴 사례는 흔하다.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여유당 정약용, 완당 김정희 등 오늘날까지도 친숙한 그 모든 호들이 서재의 이름이었다. 다시 말해 당시 선비들에게 서재란 책을 보관해두고 읽기만 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스스로 지키려 했던 삶의 방향과 가치관, 아울러 개인의 기호와 취향을 담아낸 공간이었다.
긴 세월을 유배지에서 보낸 다산 정약용은 혈기방장했던 젊은 시절을 반성하면서 ‘여유당(與猶堂)’이라는 서재 이름을 내걸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여(與)가 겨울에 시내를 건너는 것처럼 하고, 유(猶)가 사방에서 엿보는 것을 두려워하듯 하라’는 글귀에서 빌려왔다. 다산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학자로서의 삶을 그렇게 아로새겼다. <옛 선비들의 호와 서재 이름이 일치하는 이유는… http://goo.gl/Lje9NZ>
-유전적인 요인이나 생활습관이 암을 부른다는 통설과 달리 암의 3분의 2는 세포분열에서 ‘우연히’ 일어난 돌연변이 때문에 생긴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연구를 이끈 버트 보겔스타인 존스홉킨스대학 교수는 “모든 암은 불운(돌연변이)과 환경, 유전적 요인의 조합으로 발생한다”며 “따라서 암을 예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최대한 빨리 진단을 받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암은 운이 없어서 생긴다? http://goo.gl/Vz0Ud9>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시무식 자리에서 “지난해 매입한 한전부지에 105층 고층 빌딩을 지어 회사 이미지 제고와 국가경제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요 그룹 총수와 최고경영자들이 신년사 보니… http://goo.gl/6I0WyU>
-전문가들은 박수와 야유에 항상 노출 되어있는 스포츠 선수도 ‘감정노동자’라고 말한다. 잘할 땐 팬들로부터 박수와 찬사를 받지만, 반대 경우엔 야유와 비난을 견뎌야 한다. 상대팀 또는 상대선수를 응원하는 팬들로부터 온갖 언어폭력과 모욕을 당하기도 한다. 대중 앞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는 스포츠 선수들은 고통스럽지만 그런 상황을 참고, 극복해야 한다. 연예인도 마찬가지고 직장인들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라면 그 누구도 ‘감정 노동’을 피해 갈 순 없다. <무엇이 ‘공룡’ 하승진을 라커룸서 대성통곡하게 했나 http://goo.gl/b6PUHV>
-전통적으로 순결은 백색으로 표현되지만, 푸른색이 오히려 더 적합할 것 같기도 하다. 진해질 수도 옅어질 수도 없는 백색은 언제까지나 백색으로 남아 있지만, 푸른색은 옅어져서 투명함에 이를 수도 있다. 그래서 청색은 비물질적 이미지를 누린다. 자연의 색깔 가운데 푸른색을 지닌 것은 하늘과 바다인데, 그것들이 또한 무한의 상징이자, 푸른색의 비물질성이 더욱 굳건하다. 양이 순결을 뜻한다면 이 비물질성의 푸른색이야말로 가장 어울리는 색깔이기도 하겠다. 올해는 ‘푸른 양’의 해다. 하지만… <성찰과 변화가 없다면 ‘푸른 양’이 무슨 소용인가 http://goo.gl/UweuJ0>
-‘솨이거’(帥哥·잘생기고 멋있는 남자)로 불렸던 후진타오(胡錦濤) 전 중국 국가주석은 공처가로 알려져 있다. 부인 류융칭(劉永淸) 여사는 그와 칭화대 수리공정과 1959년 입학 동기생이나 나이는 두 살 많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그림자 내조로 좀처럼 튀지 않았던 류융칭은 똑부러진 성격으로 남편의 신뢰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후진타오는 자신의 친구에게 “다른 여성에 비해 외모가 특별히 아름답지는 않지만 내가 무한히 신뢰할 수 있는 반려자”라고 부인을 평가했다는 일화가 있다. <‘허리 아래는 문제 삼지 않는다’는 중국, 충격적인 권력층의 축첩(蓄妾) 실상 http://goo.gl/CeIw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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